"내가 우쭐하며 즐겼던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칭찬만큼이나 그 질투도 두렵다.
나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향해 홀로 걷는다."

- 미켈란젤로의 소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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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자신의 그릇이요 거울이라는 말이있다. 천갈래 만갈래 흩어지는 세상사를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스스로 마음의 척도에 달린 일이라는 말일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애초부터 외로움을 등에 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부족한 2%를 채우려는 섭리가 가당찮은 욕심을 불러오고 이로써 끝도 없이 물질, 이성과 감성, 지식을 추구하면서도 행복해지지 않는 탐욕의 욕망 덩어리 자체가 되어버린다.

없는것을 있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미술가야 응당 꿈과 상상의 세계가 현실의 비중보다 크기 마련이니 이런 괴리감이 어쩌면 고지식한 아집의 인격체로 자라나게하고 또 이 자체가 예술을 이끌어내는 원천인지도 모를 일이다.

피렌체의 지도익히 알만한 르네상스 시대는 많은 미술가들이 작품을 주문받고 만들어내던 시대였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가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곧 돈을 벌기 위한 중요한 출세 수단의 하나이기도 했던 탓에 꽤나 유명한 미술가들이 주문이 많은 곳으로 몰려드는건 당연한 결과였으며 특정 지역의 좁은 땅덩어리에 넘쳐나는게 예술가였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서로 경계하고 앞다투어 경쟁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생성되었으리라. 또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처절한 경쟁은 항상 뒤따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기백년 전 있었던 상황이나 오늘날의 상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는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르네상스시대의 3대 미술가로 꼽는 사람이 곧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이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고집불통 외골수와 함께 당대를 이끌어가던 쌍두마차격의 인물이 레오나르도였으며 그는 미켈란젤로 보다 나이가 23세나 많은 노장이었다. 그런만큼 연륜과 경험에 의한 사회적 지위도 안정되어 승승장구했으리라 생각되지만 미켈란젤로와 같은 신출내기의 무서운 도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기적 거장이라 일컫는 이들이 피렌체라는 작은 공간에서 활동한다는것 자체가 매끄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 올것이 분명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이들 또한 서로 시기하고 힐책하고 비난하는 충돌을 비켜갈 수는 없지 않은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충돌은 당시나 지금이나 그 오랜 역사 속에 잔잔히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우리를 사색하게 만든다. 

혼자 외로이 선두를 질주하는 일은 오랜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법이다. 견제하고 담금질하며 자신의 옅은 부분을 돌이켜보거나 깨닫게 할 그 어떤 자극으로, 보다 나은 진일보를 가져오기 마련이며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충돌이 서로에게 더더욱 큰 힘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충돌은 충돌이고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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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1501-1504년 대리석 (높이 410 cm)
Galleria dell'Accademia, Firenze
일화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명성이 높고 사교성도 좋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진 계기를 찾아가자면 미켈란젤로의<다비드 상>에서 비롯된다. 다비드상의 설치장소를 두고 레오나르도가 반대하게 되고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질투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화가 조반니 디 가비나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다.
몇몇 화가들이 단테의 시 한 구절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레오나르도에게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때마침 미켈란젤로가 그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는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자네들에게 말해줄 걸세."라고하자 미켈란젤로는 벌컥 화를 내면서 "선생 스스로 대답하시오. 선생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모욕하는 발언을 한다. 한 동한 멍하니 서 있던 레오나르도에게 "밀라노인들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선생을 믿었던 거요."라며 일침을 놓고 자리를 떠나버린다. (사실 당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염원이었던 거대한 청동 주조 말 조소를 만들다 전쟁으로인해 청동이 부족한 탓에 중단한 작업이 있었다.)

당시 미술가들이란 오늘날의 미술가와는 달라 철학, 인문, 사회, 과학, 기술, 건축, 의학 등등 다방면에서 능숙한 만능 엔터테인먼트였다.
미켈란젤로 역시 300여 수의 소테트와 연가를 남긴 시인이도 했었던 당시 문학의 전문가이면서 단테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부탁한 레오나르도에게 까칠한 모욕으로 답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미켈란젤로의 성품을 살짝 넘볼 수 있는데 상당히 모난 성격에 직설적인 입바른 소리를 잘 하는 인물이었으며 고집불통의 외골수여서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맞아 가면서도 예술가로서의 길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한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코가 함몰되어 대가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추남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이유 또한 그의 성품 탓으로, 1489년 한 조각가의 도제 생활 당시 동료 피에트로 토리지아노 Pietro Torrigiano의 드로잉에 대하여 과감하고 직설적인 독설을 내밷었고 질펀한 싸움이 벌어진 결과로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상처였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대부분의 조각가들을 불신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독설은 인정사정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대하기 꺼려하게 되었고 그의 멋진 예술 세계를 빼놓고는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싶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질투하거나 외면하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작업실 문을 꽁꽁 틀어 잠그고 작품에 임하기로 유명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드로잉
이렇게 사이가 벌어진 둘 사이에서 서로의 예술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각가는 무식하게 팔뚝 힘으로 작품을 만든다. 조각은 언제나 엄청난 양의 땀을 동반하는 기계적인 육체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대리석 먼지가 뒤범벅돼 진흙 같은 것이 조각가의 얼굴을 가득 덮는다. 그 꼴이 마치 제빵사 같다. 그들의 등은 돌 부스러기 눈보라로 뒤덮이고, 그들의 집은 지저분하기 짝이없다.
하지만 화가에게는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화가는 아주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 작품과 마주 대한다. 안락함의 측면에서 그들은 완벽하다. 잘 차려입은 그들의 경쾌한 붓놀림이 화면 구석구석에서 춤을 춘다. 그들의 집은 언제난 청결하고 매혹적인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 망치질이나 여타의 잡음이 뒤섞이지 않기에 작업하는 동안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최상의 즐거움을 전해 주는 아름다운 글들을 읽을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드로잉이에대해 미켈란젤로는
"불필요한 초과분을 제거하는 예술"이라는 말로 조각을 옹호했는데 "붓을 들고 작업하는 도중에 실수를 저지른다면 곧 그 위에 다시 고쳐 그릴 수 있지만. 대리석을 깎는 도중에 실수를 한다면 곧 작품 전체를 버려야 한다. 조각은 그만큼 정확한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이렇듯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긍심은 당대 최고의 자리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져 왔던 경쟁관계가  잘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교두보적 역할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둘의 예술세계는 다른듯 하면서도 서로 닮아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서로 라이벌이자 동반자였던 것이다.


곧이어 이들 경쟁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세기적 미술가 두 명이 한 자리에 맞붙은 불꽃튀는 쟁점이었으며 세월을 두고 끝없이 전해져 오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1503년 당시 피렌체의 시장 피에로 소데리니 Piero Soderini는 베키오 궁전의 대회의장에 앙기아리 전투를 주제로 해서 레오나르도에게 벽화를 그려달라고 주문하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다비드상의 작업이 끝난 미켈란젤로에게 그 반대쪽 벽면에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벽화를 주문하면서 부터 문제의 발단은 불거져 나오게 된다.

아마도 최고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의미 외에 당대 최고의 화가 두 명을 한 자리에 대립시키므로 최고의 예술을 향한 미학적 경쟁심을 야기시키고 아울러 상당한 홍보와 이벤트 역할을 동시에 가져오는 다중적 실리를 챙기자는 소리데니 시장의 발빠른 계산과 속셈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베키오 궁전의 대회의장 내부 모습
 • 베키오 궁전의 내부 모습

1505년 6월 6일 금요일, 다빈치는 첫 작업을 시작했고 오후 1시 그때의 순간을 다빈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막 붓을 들었을때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바람에 밑그림이 벽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것은 매우 거센 폭풍우였다. 그리고 밤처럼 캄캄했다."
어쩌면 시작부터 기묘한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암담해질 결과를 이미 예지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레오나르도의 벽화기법은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프레스코 벽화기법은 건조기법(fresco secco)과  습식기법(fresco buono)의 두 종류였으나 그의 스승이었던 베로키오는 프레스코 기법을 몰랐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역시 프레스코 기법을 전수 받을 수 없었으며 벽화기법에 상당히 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름의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내야 했고, 때문에 완성으로의 난관은 점점 높아져 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기법이라는 것은 고대 플리니(Pliny)의 납화법(열로써 도료를 벽에 착색시키는 방법)을 응용하여 물감에 왁스를 섞어 바르는 것이었지만 이 왁스합성 물감은 잘 마르지도 않을뿐더러 색을 서로 뒤엉키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3년여의 기나긴 사투에도 불구하고 1505년 작품을 포기하기에 이르른다. 그 결과는 레오나르도의 참담한 패배였던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다른 벽화들 역시 현재 상당히 훼손도가 높아서 그 유명한<최후의 만찬>역시 겨우 알아볼 정도의 이미지만 전해오지 않는가. 

루벤스가 모사한 앙기아리전투
• Peter Paul Rubens <앙기아리 전투>(The Battle of Anghiari),1615년 작 종이에 분필과 잉크 45.2 x 63.7 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 1505년 이 벽화의 밑그림이 공개되자 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후배 화가들이 그림을 모사하곤 했다. 그 대열에 30대의 젊은 루벤스가 끼어 있었던지 모르겠지만 루벤스의 이 작품은 다빈치가 그린 벽화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벽면은 1570년 바사리(Vasari)의 작품으로 대치되어 버리는데, 일각에선 레오나르도의 추종자였던 바사리가 그의 작품을 없애버린것이 아니라 새로운 벽을 앞에 쌓고 그위에 그렸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바사리의 작품 뒷쪽에 있을것이라 추정하는데 현재 조사된 것은 없으며 레오나르도의 그림 역시 현재 남아있지 않다. 세로 8m 가로 20m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가장 큰 그림이었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루벤스가 남긴 모사를 통해 그 웅장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상상해봄직 하다. 


그러면 맞은편 벽면에 임했던 미켈란젤로는 어떠했을까.

작품의 내용은 이러하다.
1364년 무더운 날 피렌체 군인들은 피사 군인들에 의해 포위될 것을 염려하면서 카시나 근처 아르노 강에서 미역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피렌체 지휘관이 실수로 한 경고에 놀라 허겁지겁 물에서 나와 전투 태세를 취하려 한다는 내용의 전개이다.
이것은 전쟁과는 좀 거리있어 보이는 주제이다. 응당 시의회는 영웅이 등장하고 전쟁에 승리하는 역동적인 장면을 원하였을 것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엉뚱하게도 누드가 등장하는 에피소드 장면으로 구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독촉으로 로마로 불려가면서 스케치 후 붓도 한번 못대보고 미완성으로 그 끝을 맺게 된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대로 천으로 가려놓고 비밀스런 작업을 진행했었기 때문에 작품의 진척이나 정황, 전체적인 모습 또한 전해져 오지 않을뿐더러 그 스케치 역시 17세기 중반에 모두 사라져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다만 1542년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의 모사작이 남아있어 부분적으로나마 어떤 작품인가 짐작할 수 있는데, 그가 모사한 장면은 세로 7m 가로 17.5m의 전체 중 가운데 부분으로 전체적으로는 좀 더 많은 사람과 말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으나 배경이 생략되어있어 전체적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따름이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미켈란젤로의 실험적 인체 묘사의 시도는 이후<최후의 심판>을 탄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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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stiano (auch: Aristotile) da Sangallo
  - Grisaille nach Michelangelos Schlacht von Cascina, ca. 1542, Norfolk Copy from Michelangelo

51세의 원로 레오나르도와 29세의 신예 미켈란젤로,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품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즐겁다.
나이와 세월을 넘어 예술을 향한 응축된 혼이 뿜어져 나오는 현장이란 현재도 무척이나 드문 볼꺼리요 흥미꺼리지 않은가. 어쩌면 신은 한 자리에 두 거장의 역작이 같이하길 싫어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둘 다 실패에 그쳤고 그 이야기는 미완성의 오묘한 맛과 함께 우리의 가슴을 타오르게 한다.

오늘날. 신예 작가가 거쳐야 할 난관 중에는 오랜 연배와 연륜에 의한 편협된 시각과 지인에 의지한 모종의 거래를 제 1의 타켓으로 삼는다. 전시회를 거치면서 팜플렛에 약력을 누가 많이 줄줄이 적어 내려가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비단 예술이라는 모호함과 자본적 사회의 일면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사람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신의 불꽃이 살아있다며 임종의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던 베토벤의 슈베르트 악보와 서로 다른 예술의 세계를 가지면서도 한 이불로 잠자리에 들 만큼 서로를 아꼈던 중국의 이백과 두보이야기는 사람으로 비롯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감성과 정도(正道)의 예술인 동시에 보다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예술세계를 전해준다.

현실적인 가벼운 안위의 공든탑 보다 깊은 침잠과 사색으로 얻어질 수 있는 내면의 가치야 말고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잘 포장되고 맛깔스럼직한 음식보다 그 본질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원조집이 필요한건 누가 생각해도 득되고 좋은 일일게다. 하물며 연륜과 세월이라는 계급장을 내려놓고 순수한 창작열에 끓어 오르는 본연의 자세는 더할나위 없음이다.

오늘 바라본 그들의 에피소드 한 편을 통해 현실의 물질적 가벼움 이상의 깊은 예술혼과 최고의 예술작품을 향한 정열적인 집착을 나이와 지위 벗어놓고 생을 통해 순수함을 보여준 타오르는 예술세계는 새천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속에 여전히 전설이되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