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jpg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하루하루 삶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거나 감사의 기도가 일상화된 성직자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지만 생전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은 많지 않다. 누구나 오늘의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이다.

가정의 행복 중심에는 부부가 있다. 하지만 부부라는 것이 행복을 담보로 결혼했어도 삶의 여정 속에서는 행복보다는 불행의 그림자와 친숙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타산 때문에 만나는 타인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부부이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상처받기 더 쉽다. 차라리 타인이라면 뒤돌아서서 잊어버리면 되지만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사는 부부이기에 상처가 배가 된다. 이해와 양보가 없다면 부부가 불행 속에 포위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부가 이해와 양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섹스코드가 맞아야 한다. 섹스가 맞지 않는 부부는 노력해도 불행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고통 속에 단단해지는 부부관계●

펠릭스 누스바움의 <저녁-펠카 플라테크와 함께한 자화상>

부부는 행복할 때 서로의 존재를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격랑의 파도에 휩쓸려 있을 때에는 서로의 존재를 명확하게 느낀다. 부부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를 탓하고 있다면 파도에 휩쓸려 가정이 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난파선을 탄 부부는 그 어떤 때보다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부부애가 돈독해야만 한다. 부부애가 나쁘면 싸움하기 바쁘기 때문에 침몰하는 원인을 떠넘기기에 바쁘다. 누스바움의 <저녁>은 어려운 환경 속에 내몰린 부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다는 것을 표현한 작품으로서 부부 관계의 근원은 섹스라는 것을 나타냈다.

텅 빈 방안에서 여자는 왼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실내화는 신은 채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고 남자는 바지를 허리춤에 걸친 채 신문을 밟고 서 있다.

카펫 위로 남자가 밟고서 있는 구겨진 신문에 ‘LE SOIR(저녁)’라는 제호가 선명하게 보인다. ‘저녁’은 독인 군정의 공식신문으로 유태인들에게는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신문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뒤쪽 난간에는 깨진 도자기가 놓여 있는데 깨진 도자기는 부부의 고난을 상징하고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올리브 나무는 희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어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트인 벽 뒤로 보이는 거리에 젊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고 늙은 남자는 죽은 나무를 향해 지팡이를 짚고 걸어 가고 있다. 닫힌 건물 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의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여자가 순종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슬리퍼를 신은 발을 남편의 맨발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서로에게 뻗은 팔은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텅 빈 방안과 바깥의 풍경을 통해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와의 극명한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펠릭스 누스바움<1904~1944>의 <저녁>은 누스바움이 아내와 함께 한 2인 초상화로서 1942년에 완성했지만 그 해 가을, 나치가 벨기에에서 행한 유태인 탄압 때문에 브뤼셀 작업실에 남겨 두고 떠난 작품이다. 당시 나치의 유태인 탄압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벌거벗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부부임을 암시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세상의 격동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부부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탈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부부는 나치의 유태인 탄압에 희생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죽더라도 내 그림은 소멸케 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부부관계가 때로는 치욕을 선사●

맷 앤더슨의 <부부-마르깃과 칼 하인츠>

부부가 행복하려면 첫 번째 속궁합이 좋아야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연인이 결혼해서 가장 좋은 점은 섹스가 자유롭다는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고, 섹스하기 위해 집 바깥을 맴돌 필요도 없고, 섹스하기 위해 돈을 지출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했다고 해서 섹스 코드가 다 맞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젊으면 젊을수록, 여자는 중년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섹스가 왕성해진다는 것이 부부 섹스의 비극이다. 또 남자는 시각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곧바로 섹스 생각이 나지만 여자는 분위기에 취하면 섹스가 생각난다는 점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다. 그러기에 부부라고 해도 섹스 시기가 마음처럼 딱 맞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부부가 행복할 때에는 서로의 기분과 섹스 시기를 맞춰 주지만 불행한 부부는 곁에 오는 것도 싫다.

앤더슨의 <부부>는 섹스 시기가 맞지 않아 강제 추행하는 부부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마르타>(1974)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

흰색의 침대 시트의 누워 있는 여인의 피부는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다. 남자는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여인을 안고서 입을 맞추고 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은 힘으로 제압하는 남자를 상징하고 불투명하게 묘사된 것은 성추행을 암시한다. 남자와 반대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선홍색의 여자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성추행의 고통에 아파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맷 앤더슨<1975~>은 이 작품에서 사디스트 남편이 뜨거운 햇볕에 피부를 그을린 아내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여인의 피부색을 선홍색으로 남자는 검은색 턱시도로 표현했다. 앤더슨은 두 사람이 침대 위에서 겹쳐 있지만 모호한 상황을 영화 속 배우들의 이름으로 부제를 택해 설명하고 있다.

■박희숙 동덕여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한 후 7회의 개인전을 연 화가다. 2004년에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를 출간하면서 작가로도 명성을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