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결코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감정이라서 조심하면 피할 수 있지만 그것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한 번 생기면 생명이 다하거나 희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은 감정이 사랑인 것이다.ㆍㆍㆍ
사랑은 우리에게 거짓 희망을 주며 심지어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집착하게 만든다.
또 행여 잃어버린다 싶으면 더욱 격렬한 정열이 뒤쫓아 가뜩이나 쓰라린 심정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감정이다."
                                                                                                                                          - 라 클로 <위험한 관계>


이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사람의 수 만큼 다양하고 수많은 운명이 있다해도 사랑만큼 가슴에 큰 흔적을 남기는 것도 없으리라.
그 절대적인 영혼의 힘은 가히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어서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요함과 광란에 가까운 파괴가 따르기도 한다. 미련하고 아둔하지만 광기의 벼락으로 부터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며 서로에게 사로잡히는 젊은 날의 그 사랑은 모든 사랑의 최상이며 예술의 소재로도 끝없는 정점의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많은 학자들이 이를 질의하고 파헤치고 정의해봐도 그 성질과 형체를 더더욱 알 수 없음의 모호함으로 기묘하기 짝이없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아름다움의 원천인 사랑의 끝은 항상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취하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현실의 연이 닿지 못해 다음 생을 기약하며 떠나야 했던 가슴아픈 사랑이 있는가 하면 꿈같은 해피앤딩도 있기마련이다.
전자가 지옥같은 이별이라면 후자는 천국같은 앤딩이어야 하는데 대부분 현실적으론 그렇지 못하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 한 점이다.
물론 평생을 두고 마음 설레는 로망스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세월의 거품으로 증발해 말라만 간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평범하고 일상적이 되어 없는 듯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는 망부석 같은 존재가 되어버곤 한다는 말이다.
이와같은 사랑? 참 재미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그렇다해서 사랑이 멀리 달아났다곤 할 수 없다. 어쩌면 열병 같은 사랑의 일장 단막은 끝나고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길목일런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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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소녀1892년, 116 x 90 cm, 캔버스에 유채,오르세미술관, 파리
이 즈음에서 젊은시절 불같은 사랑을 넘어 삶의 한 가운데 지나야 할 이정표가 될지 모를 한 화가와 여인의 따뜻한 삶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가 보자.

인류의 자취와 함께 그들이 남겨놓은 명화에서 찾을 수 있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이상적 관능성만으로 점철되어 온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애로틱하게 때로는 화려함으로, 때로는 살로메의 치명적인 독과 같이, 또 때로는 아무런 치장과 꾸밈없는 본연의 따스함으로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에게 말 건네 온다. 그런만큼 수많은 화가들이 여성의 아름다운 이면을 찾아 표현해왔고 엄청난 양의 다양한 그림들이 산재해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그 중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의 여성을 잘 담아냈던 화가가 있었다.
 
그가 뿜어냈던 은은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는 사랑스런 여인의 따스함과 속삭임으로 싱그러운 정취에 우리를 흠뻑 빠져들게 하고,  때로는 푸른색의 유리와 크리스탈의 반짝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더욱 운치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곤 한다.
그의 여인은 잔뜩 치장한 8등신의 가벼운 미녀가 아니다. 봄의 꽃처럼 화사한 여인의 매력이, 복숭아 향기처럼 은은히 간지럽히는 사랑의 아련함이 녹아든 여인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그의 이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 2. 25. (프랑스) - 1919. 12. 3.).
일생을 두고 유희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만큼 그의 작품은 생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그 가득함의 한켠에는 한 평생 같이 하면서도 잊지못하여 내생을 약속할 소중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 속으로 살짝 들어서 보자.

르누아르는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13세 때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그림의 재능, 열망은 퇴근 후 그를 정통 회화 기법을 배우도록 이끌었다. 21세에 비로소 국립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하게되고 이듬해 살롱에 처음 입선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터진 보불전쟁으로 30이 넘은 나이에 겨우 그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지겹도록 생존의 혈투가 벌어지는 머리아픈 현실을 벗어나 꿈과 이상의 단맛을 재연출하는 예술의 매력에 흠뻑 도취되어 어쩌면 무감각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배타적이거나 하는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이 배고픈 가난에 허덕이는건 사실이다. 힘든 인생의 여정이었지만 어쩌면 그가 가진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이후 그가 알려지기까지 큰 재산이 된 셈이다. 

그의 여인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를 처음 만난건 40세가 되던 해 모델과 화가의 인연이었다.
르누아르와 알린은 나이가 무려 18살 차이난다. 더군다나 법률상 혼인은 처음 대면 이후 10여년이 흘러 1890년 르누아르가 49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첫아들 피에르가 4살이 되던해에 공식 부부가 된다.
오늘날 개방적인 시각으로 생각해도 의아하리만큼 별난 만남이다.

사랑에 도취되어버린 연인들의 마음의 눈, 혼의 눈은 본능적으로 영혼의 깊은 흠모 대상에 완전히 집중되기 마련이다.
이 깊은 몰입의 황홀함은 솜사탕과 같이 달콤하여 함부로 깨어니지 않으려 한다.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가 감각을 마비시키는 '미에인(Myein)'인 것이다.

알린은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 재배 마을의 농부의 딸이었다. 하지만 병적으로 심한 결벽증과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가진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는 미국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게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알린은 생계를 위해 바느질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돌이켜 생각컨데 이러한 알린의 가정 환경이 그녀를 르누아르와 여생을 같이 하게만든 주요한 동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아버지로 부터 받았어야 할 부정(父情)의 갈망과 어머니의 부친에 대한 냉담함이 채우지 못한 그릇처럼 가슴 한켠에 남아 르누아르와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게 만들고 일생을 두고 그에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이끌어 내는 초석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르누아르의 모델이기도 했지만 그의 여인으로써 바지런히 움직임을 살피는 르누아르의 눈길은 여러가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바르비에르 백작이 화가와 여배우들을 초대하여 배푼 연회를 담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 1879>이 만들어진다. 왼쪽편에 강아지를 붙잡고 있는 귀여운 여인이 알린이며 르누아르는 그 옆에 서 있다. 강아지에게 입 삐죽 내밀고 얼르는 모습도 그에겐 어쩌면 천사의 입김과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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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cheon by the Boating Party" (1881)
oil on canvas, 51x68 inches, Phillips Collections in Washington, D.C.

하지만 이즈음 르누아르는 이 사랑하는 여인을 파리에 남겨둔체 알제리로 돌연 여행을 떠나버린다.(1881)
그 이유가 당시 풍미하던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불화로 인한 고민과 혼란 때문이었는지 또는 사랑하는 알린과 맺어지기 어려운 마음의 중압감과 불행때문인지는 알길이 없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얽히고 섥혀 르누아를 괴롭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커져만 가는 부담감과 심적인 갈등, 무거워진 피폐한 몸을 이끌고 홀가분히 친구 몇명과 다녀오는 여행길이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했을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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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nd Bather(Baigneuse blonde)
1882,Oil on canvas, 82 x 66 cm
Clark Art Institute, Williamstown

하지만 사랑의 힘이란 사이를 갈라놓는 장애가 생길수록 더더욱 타오르기 마련이다.
마음을 추스렸거나 운명으로 삼을 준비가 되었거나... 르누아르는 남이탈리아에 머무르며(1882) 알린을 불러 함께 지내게 되는데 이때 완성된 그림이<금발의 욕녀>이며 어린 소녀의 장미빛 피부와 투명함이 풍만한 색채와 잘 조화되어있어 꽤나 유명한 작품이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림 속 알린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어쩌면 르누아르는 마음의 정리가 끝난 즈음 그토록 번뇌하고 애잔해하던 알린에게 일생을 함께하자 약속했을것이라 짐작된다.

노년에 그의 둘째 아들 쟝 르누아르(영화감독)의 회고록에서 아래처럼 말한 적 있다.
"마누라와 가끔씩 떨어져 있는 게 좋지. 하지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돼.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나중에 만나면 반갑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나면
나중에 마누라의 얼굴이 밉게 보일 수가 있더든,
그건 마누라도 마찬가지겠지.
주름이 생기는 것도 뚱뚱해지는 것도 눈에 안들어오지. 애정이라는 건 습관이기도 하거든."

아마도 당시의 자신에 대한 회상이거나 변명이거나 알린을 향한 심경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1882년 파리로 다시 돌아온 르누아르는 3년 후<알린 샤리고>라는 작품을 남긴다.
그림 속의 알린은 젊은 시절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과는 다소 거리 있어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어머니가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 아이가 생기므로 새롭게 전개 될 세상을 향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1885년 첫 아들 피에르, 1894년 둘째아들 장, 1901년에 샛째아들 클로드를 낳았다.)
늦은 나이의 르누아르에게 자식은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알린 역시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폈다 한다.
이 당시의 그림 <엄마와 젖 먹는 아기>역시 가족 초상으로 건강함과 평온한 분위기가 충만하다. 첫 아이의 기쁨은 첫 사랑의 낭만적 사랑을 또 한번 가로지른다. 이들에게 온전한 가족의 행복함은 천상의 그 무엇보다 값지고 귀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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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ne Charigot. Philadelphia Museum of Art. 1885.
mother nursing her child (aline_and_pierre) 1886
aline and pierre. 1887. Pastel  on Wood. 65.4cm x 81.3cm. Cleveland Museum of Art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손에 붕대를 묶어 그림에 몰두하는 르누아르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
이들의 온전한 사랑에 시샘하는 신의 노여움이라도 있었던 탓일까. 생의 아름다움에 흠뻑젓은 그들에게도 시련의 먹구름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그 첫 시련으로 1897년 르누아르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후 평생을 두고 류머티즘성 관절염이라는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후유증에 끊임없이 고통받게 된다. 이 병은 점차 온 몸으로 전이되며 관절을 꺽이게 하는 기이한 불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치병 조차 르누아르의 작품을 향한 강렬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휠체어에 의지해야할 정도로까지 병약해지지만 꺽여진 손에 붓을 감아 작품에 임했다는 타오르는 열정은 세월을 두고 우리에게 더없이 큰 귀감이 된다.

이와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알린 역시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변하지 않는 숭고한 사랑과 인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는 것이요 그녀가 없었다면 불멸의 작품들도 빛을보지 못했을 것이다.
병상에 누운 아비를 돌보며 한 가족을 이끄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뼈를깍는 고통을 수반하였을까.   

하지만 알린은 르누아르가 그림그리기에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르누아르가 산책이나 나갈라치면 모퉁이를 돌 때 마술같이 집안을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올때쯤 르누아르가 좋아하는 손을 바지런히 움직이는 여자가 되어 깨끗한 주방에서 일하곤했으며, 르누아르가 그림을 그릴때는 말 상대를 하며 옆에서 뜨게질 따위를 계속했고 꽃 그리기를 좋아하는 르누아르를 위해 새벽 같이 나가 정성들여 골라오는 아내였다. 심지어 투병중인 르누아르에게 짐이될까 자신이 앓고있는 당뇨병을 숨기기도 했었다.
그녀는 분별있는 생활력도 돋보였지만 춤도 잘 추었고, 배를 타고 노 젓는 것을 좋아하며 수영도 당구실력도 뛰어났다. 더불어 여성으로 낚시를 즐기는 것은 그녀의 외향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이런 천성이 어쩌면 오늘날의 르누아를 만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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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Renoir avec Bob. 1910. oil on canvas
Wadsworth Atheneum, Hartford

인생의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14년 일어났던 1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참전한 두 아들에게 부상을 안겨주게되고 이 비보는 노년의 부부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이 모든 일들에 사력을 다해 강한 의지로 맞서 물리치며 기력을 다한 탓일까 아들의 병상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 알린은 쉰 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남편은 병환으로, 두 아들은 아전막사에 둔 채 막내 클로드(14세)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움이 짖누르고 있었을까. 진정 끊임없는 삶과의 전쟁이었다. 그것이 한 남자를 사랑하고 겪어야 할 운명이라면 가혹하리 만큼 아픈 가시밭 길이었다. 평화로우며 완성된 삶의 끝은 저 너머에 힘없이 던져두고 돌아서야 했던 알린의 생은 이런 모습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르누아르는 마지막으로 그린 알린의 초상화를 가까운 곳에 걸어두고 일흔 여덟의 나이로 뒤따라 가게된다.
꿈에라도 함께 하고픈 그리운 여인을 향한 르누아르의 애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것만 같다.
르누아르가 남기 알린의 마지막 초상화는 <르누아르의 부인>이란 작품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나이에 중후하고 따스한 색채로 둘러싸인 이 그림은 주마등 처럼 지나가는 한 여인의 일대기를 잔잔히 투영하고 있다.

한편으론 그녀의 주위에 삶의 기쁨은 남아있지 않았다.
매 순간 산재한 시련의 아픔이 거두어질줄 모르고 버티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의 사랑은 속된 것과 숭고한 것,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진실한 사랑이란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사랑과 미움, 질투와 분노가 희미하게 뭉개지면서 측은지심만이 남게 된다는 얘기와도 통하는 것 같다.

노년의 사랑을 황혼에 비유했던가. 하루의 햇살 중 가장 현란하게 아름다운것이 붉은 노을의 아름다움이 아니던가.
이들의 사랑은 도취와 열광과 광기의 젊은 사랑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사랑과 같지 않다고해서 서러워질 이유가 없는 근본적인 사랑인 것이다. 괴테는 40세에 이르고서야 참된 사랑을 알게 되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었다.
르누아르가 곧 알린이요. 알린이 곧 르누아르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만들어간 삶과 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본질적이며 최상위에 존재할 사랑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오늘 만큼은 르누아르의 화려한 세상에서 살짝 한걸음 벗어나 그가 살다 간 굴곡깊은 인생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그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되새겨야 할 근본적인 삶의 진실과 사랑의 본질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는것은 어떨까.